언론보도

제목 혁신신약 개발하려면 지식공유 인프라 강화해야
작성일 2021-09-14 조회수 1044
작성자 관리자

혁신신약 개발하려면 지식공유 인프라 강화해야

 

신약 연구 세계 10위권, 한국이 갈 길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2003년 국산 신약이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후 11년 만인 2014년 국내 제약회사의 신약이 두 번째로 FDA의 승인을 받았다. 이 신약의 후보물질을 찾기 위해 1217번 실패를 반복했고,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제품 코드명에 아예 이 숫자를 집어넣었다는 눈물겨운 일화가 숨어 있다.

0.04%도 안 되는 신약 성공률

신약개발은 지난한 작업이다. 보통 1만 개 정도의 잠재적 아이디어, 즉 후보 물질에서 시작한다고 할 때, 전(前)임상으로 불리는 동물실험을 통과하는 것은 불과 200여 개 남짓이다. 이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 1·2·3상을 거쳐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겨우 1개가 될까 말까다. 성공률이 0.01%라고도 하고 0.04%라고도 하는데, 혁신적 결과에 이르는 문이 바늘구멍만큼이나 좁다는 것을 금방 이해하게 해주는 수치다. FDA 승인을 얻어도 시장에서 기대만큼 수익을 올리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혁신적 자율주행차를 만드는 과정을 또 다른 예로 들어보자. 여러 가지 아이디어로 초기 버전을 만들고, 도로주행 등 각종 test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디어 대부분은 폐기되고, 살아남은 것도 test 결과를 바탕으로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스케일업(Scale-up)’ 과정이라 한다. 아이디어를 생각하기도 쉽지 않지만, test하면서 버리고, 개선하는 과정은 실패 가능성이 크고, 여러 번 해본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직 아이디어 수출 단계에 그쳐
숱한 시행착오 통해 기술 키워야
연구·지식 공유할 시스템 필수적
대학·기업 넘어 국가서 구축해야

신약 하나가 탄생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기막힌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가능성 있는 후보물질을 만들었더라도, 여러 test를 거치면서, 선별하고 개선하는 스케일업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약의 스케일업 과정은 비용이 많이 들고, 기간이 길 뿐 아니라 실패 위험이 큰 것으로 유명하다. 신약 하나당 1조원 이상의 비용에 10년 이상의 기간, 99.9%의 실패위험이라고 하면 금방 감이 온다.

 
국가 마우스 표현형 분석사업단(KMPC) 연구원이 지난달 30일 서울대 캠퍼스의 KMPC 무균 마우스 실험실에서 무균쥐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국가마우스표현형분석사업단(KMPC) 연구원이 지난달 30일 서울대 캠퍼스의 KMPC 무균 마우스 실험실에서 무균쥐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그래서 이 스케일업 과정은 기술 선진국 글로벌 제약사들의 독무대다. 이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연구실과 기술벤처의 좋은 아이디어나 동물실험을 통과한 후보물질과 기술을 싼값에 구해 축적된 스케일업 경험을 바탕으로 임상 과정을 설계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하게 되면 기술을 제공한 기업 혹은 연구자에게 아이디어값으로 일정한 로열티를 준다.

한국 제약산업은 1970년대 선진국에서 만들어진 원료 약품을 모방해서 합성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80~9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과 공공출연연구소의 기초연구 역량이 높아져 새로운 후보물질을 합성해내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제약회사들도 신약개발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정부도 이에 발맞춰 바이오·제약 산업 육성계획을 제시하면서 지원책을 강구했다. 이제 새로운 후보물질을 찾는 기초연구 수준은 이미 글로벌 10위권으로 평가되고 있고, 의약품 수출로만 보더라도 2020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스케일업(Scale-up)’ 경험 부족한 한국

하지만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를 라이선스 아웃(해외에 팔고)하고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이를 받아 임상을 수행하는 방식은 아직도 크게 변함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행착오를 버티면서 아이디어를 test하고 개선해나가는 험난한 스케일업 과정을 겪어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른 기술분야에서도 정확히 같은 이유로 스케일업 과정을 글로벌 기술 챔피언 기업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

신약의 스케일업 과정에서 동물실험은 최초의 관문 역할을 한다. 동물실험에서는 유전자편집 등의 기술을 이용해서 특정 질병을 가진 모델 동물을 만들고, 후보물질을 투여해서 그 질병이 효과적으로 치료되는지, 다른 부작용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작은 쥐(마우스)부터 큰 영장류까지 다양한 동물들을 활용하는데, 마우스가 9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추정컨대 인간과 97% 이상 유전자가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수명주기가 짧은 데다가, 번식력도 좋아 노화나 세대를 넘는 현상까지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마우스 연구수준은 신약 분야 국가경쟁력을 가름하는 중요한 지적 인프라다. 대표적인 연구기관으로 국제적으로 마우스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미국의 잭슨랩(The Jackson Laboratory)은 역사가 90년이 넘는다. 연간 약 270만 마리를 다루며, 미국을 포함해 75개국 1900개 기관에 특수한 모델 마우스들을 제공하고 있을 정도다. 지난해에는 국내 코로나 백신 개발과정에서 test용 모델 마우스를 만들 시간이 없었을 때, 잭슨랩의 마우스를 긴급히 공수하기도 했다. 코로나를 예상하고 만든 것이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언제 쓸지 모르지만, 여러 종의 모델 마우스를 만들어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해둔 덕분이었다. 미국의 제약회사들은 신약을 만들 때 이런 인프라를 이용해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훨씬 유리한 고지에서 출발할 수 있다. 시간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의 잠재력
 

마이크로 인젝터로 수정란의 핵에 유전물질을 주입하는 모습.

마이크로 인젝터로 수정란의 핵에 유전물질을 주입하는 모습.


 

놀라운 것은 중국 난징대 바이오메디컬 연구소다. 마우스연구소 규모를 이야기할 때 흔히 사육장인 케이지의 숫자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난징대 연구소의 케이지는 무려 9만 개로 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당연히 특정 유전자를 제거한 모델 마우스를 아시아에서 가장 다양하고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게다가 최근 규모를 두 배로 더 늘리기 위한 계획에 착수한다고 하니, 거기서 진행될 다양한 실험에 기가 질린다. 선진국의 시간을 공간의 힘으로 압축하면서 따라잡고 있는 중국의 기술전략이 여실히 드러난다.

2012년 시작된 ‘국제 마우스 표현형 분석컨소시엄(IMPC)’이라는 거대한 국제공동연구는 좀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이 국제 컨소시엄은 인간과 유전자 정보가 유사한 마우스를 대상으로 유전자와 질병 간의 관계를 담은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특정 유전자가 제거된 모델 마우스를 2만 종 이상 만들어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계획이다. 언젠가 완성된다면 신약개발의 시행착오를 극적으로 줄여줄 수 있는 세계 공용의 지식 인프라가 생기는 셈이다. 한 기관이 다 할 수 없으니 분석 역량을 갖춘 국가의 연구기관들이 서로 나누어 분석하고 자료를 공유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의 ‘국가 마우스 표현형 분석사업단(단장 성제경 서울대 교수)’도 2013년부터 18개의 국제연구기관의 하나로서 이 공동의 플랫폼에 기여하고 있다.

마우스 연구에서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이지만, 나름의 축적 전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디지털 기술이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유전자와 질환의 데이터를 강력한 정보통신 인프라와 백데이터, 인공지능 기술을 결합하여 분석하고 공유한다면 축적의 속도를 한 차원 높일 수 있다. 마치 90년대 TV산업의 패러다임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될 때 한국이 새로운 디지털 패러다임으로 일본을 추월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핵심 문턱 기술을 보유하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다. 특수한 마우스를 만들기 위한 핵심기술 중 하나가 유전자편집 기술인데,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이 분야에서는 국제적 수준의 기술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국가적으로 공유해야 할 지식 인프라를 가치 있게 보는 인식이다. 마우스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나 특수한 마우스를 만드는 기술 등 기반지식은 각 연구실이 각자 시행착오를 하기보다 국가적으로 경험을 모아 공유하는 것이 득이다.

한국 ‘마우스사업단’에 거는 기대

모든 등반가가 산 아래부터 다른 사람이 다 해본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힘을 뺄 필요가 없다. 베이스캠프까지는 공적 투자로 닦아놓은 고속도로를 이용하면서 힘을 아껴야 한다. 정작 베이스캠프에서부터 남들이 해보지 않은 창의적 시행착오를 쌓는 데 힘을 쏟아야 더 높이 갈 수 있다. 좋은 지식공유 인프라를 만든다는 것은 혁신을 위한 베이스캠프의 고도를 높이는 것과 같다.

디지털 기술의 선제적 도입과 핵심 요소기술의 확보, 거기에 더해지는 국가적인 지식축적 및 공유 인프라의 구축, 이 세 가지는 비단 신약개발에서뿐 아니라 우리 산업의 여러 기술분야에서 축적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핵심전략이다. 최근 ‘국가 마우스 표현형 분석사업단’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성제경 단장과 젊은 연구원들이 유전자 샘플을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비록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선가 기술혁신을 뒷받침할 인프라를 쌓고 있는 숨은 현장이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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